사랑합니다!(테리우스원)

희귀 보호 대상 야생화에 숨은 이야기를 탐구하는 사진 작가 (정필원)

아름다운 명소

부산 임시수도기념관에서 공개되는 사건들!!

테리우스원 2013. 1. 21. 15:23

 

 

화폐개혁 1950-1953

(貨幣改革)

 

 

정부는 1950년의 제1차 긴급통화 조치로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북한군이 당시의 법화인 조선은행권을 약탈하여 시장을 교란시키자

이를 차단하기 위하여 긴급통화조치 방식으로 실시한 것이다.

 

그 결과 신설된 한국은행이 구조선은행권을 회수하고

신한국은행권을 유포함으로써 한국은행이 새로운 발권은행임을

 일반 국민에게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의 화폐개혁 제2차 긴급통화금융조치는 전쟁 중

남발된 통화와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긴급통화조치

및 긴급금융조치에 근거하여 실시하였다.

 

화폐단위를 원(圓)에서 환으로 바꾸고 구 화폐가 신화폐로

100:1로 교환하게 함으로써 명목절하가 실시 되었다.

이 화폐개혁은 전쟁으로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되자 이를 수습하고

경제부흥자금으로 이용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시행되었던 것이다.

 

 

 

 

 화폐개혁 

화폐개혁 


우리나라의 교육열을 보여준 피란학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대부분의 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부산에서는 많은 피란 학교가 개설되었다.

 

초등학교는 피란특설학급이나 분교장 형태로 만들어 졌고

중학교는 단독 혹은 연합학교 형태로 개설되었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중단 없는 교육 열정을 잘 보여준다.

부산지역 대부분의 학교는 군대나 병원으로 징발되었기 때문에

산간이나 노천에서 천막을 치거나 가 건물에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이들 학교는 한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추위에 시달렸으며,

책. 걸상 뿐 아니라 교과서가 부족한 상태에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더구나 가르쳐야 할 교사조차 징병되었으므로 교육의 질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피란지 부산에서는 전시연합대학체계도 출범되었다.

교수의 부족으로 부실수업이 진행되는 것을 막고자 대학을 연합하여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이는 부산 이외에도

광주, 전주 등지에서도 운영되었다고 한다.

전시연합대학은 전쟁 이후 지역의 국립대학이 태동하는

계기가 된 것이라 설명한다.

 

 

 

 

 

꿀꿀이죽과 부산 밀면

 

임시수도의 정부는 사회 안정을 위해 굶주림에

지친 피란민들에게 최소한의 먹거리를 제공하여야 했다.

하지만 UN과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한 식량 배급은

하루 1인당 2홉으로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꿀꿀이 죽이었다.

‘유엔탕’이라고도 불리는 이 음식은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수거하여 다시 끓여 만든 것이다.

 

꿀꿀이죽에는 햄과 소시지 등 육류까지 들어갓다.

영양 결핍에 직면했던 피란민들은 이를 소중한 영양 음식으로 여겼다.

 

 

 

 

월남한 북한 피란민들은 부산에서 냉면 장사를 하는 일이 많았다.

북한의 냉면은 부산의 음식문화에도 변화를 가져 왔으며

밀가루가 혼합된 밀면으로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갑자기 고구마 전분과 메밀을 섞어 만든 냉면은

질겨서 먹기에 힘들었지만 원조 밀가루를 섞은 밀면은 면발이

부드러워 부산 사름들의 기호에도 맞았다고 한다.

 

여기서 시우너한 육수를 곁들이자 피란민과 부산사람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밀면은 오늘날까지 부산의 대표음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시장과 도떼기시장

 

한국 전쟁당시 국제시장은 ‘도떼기시장’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제시장은 해방이후 귀환동포들이 생계를 위해 노점을 차리고,

일본인 들이 남겨둔 가재도구를 거래하면서 출발하게 되었다.

1948년에는 목조건축물이 건립되면서 ‘자유시장’ 이라는 명잋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군물자도 흘러 들어와 통조림, 기계부속, 청과,

양곡, 잡화 등이 거래되면서 규모가 커져갔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국제시장은 더욱 화기찼다.

서울이나 이북 피란민들이 국제시장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피란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의 가재도구를 팔았으며 원조물자,

 구호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품, 밀수품 등의 유통도 활발하였다.

 이 중에는 불법으로 유통된 물자도 많았다.

 

단속반과 상인들의 생존을 위한 실랑이도 시장을 시끌벅적 하게 된 것이다.

국제시장은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하는데 국제시장에는 수 차례의

대규모 화재가 발생되어 상인들을 괴롭혔다.

 

특히, 1953년 1월 국제시장 대화재 는 역대 화재 중 물질적 손실이 가장 큰 재해였다.

하지만 상인들의 억척스러운 노력으로 지금의

현대화 시장으로 복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문화사랑방으로서의 다방

 

다방은 개항 이후 근대문물의 유입과 함께 상류층의 문화 애호적 분위기에서 생겨났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점차 상업적인 용도로 변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문화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차를 마시고

쉬는 공간에서 나아가 종합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다방에서 그림 전시회, 문학의 밤, 영화의 밤, 출판기념회,

환영회, 강습회, 송별회, 추모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다방은 다른 한편으로는 허영의 표상이기도 하였다.

 전방에서 치열하게 전투하는 군인들과 달리 음악이나 감상하고

커피를 마시며 한량이 모여든 다방은 전시분위기를 망각한 퇴폐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헌병대는 수시로 다방을 습격하여 전시 상황을 일깨워 주었다고 전한다.

가난하지만 순수한 예술가들이 즐겨 찾은 다방은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의 밀다원, 금강, 스타, 춘추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 곳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을 이루어 전시에도 꺼지지 않는

예술혼을 보여주었다는 설명이다.

 

 

 

 

 

전시 예술의 중심지가 된 부산

 

전란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부산은 문화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산으로 온 피란 예술가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붓과 펜을 들어 활동을 재개 하였다.

전시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군 위문을 위한 예술 활동이었다.

 

화가들은 종군화가단, 문학인들은 전국문화단체총연명,

음악가들은 정훈국선전과, 정훈공작대를 조직하여 군부대를 위문하고

 승전 고취를 위한 후방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동시에 작가들의

작품들도 꾸준히 발표되었다.

 

 

 

대중가요에는 상이병의 노래, 삼천만의 봄, 승리의 노래, 등

군가풍 노래와 일선과 후방을 연결시켜주는 노래인 아내의 노래, 전선야곡, 등이 불려졌다.

경상도아가씨, 굳세어라 금순아, 등과 같은 대중가요는

피란민들의 고달픔을 노래한 곡들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문학인들은 비상국민선전대를 조직해 전이를 앙양시키기 위한 선전계몽활동을 펼쳤다.

1.4후퇴 이후에는 문총구국대를 결성하여 휴전 때 까지 육.해. 공군에서

 각각 활동하였다는 설명이다.

 

 

 

 

임시수도기의 정치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신생국가로서 다양한 제도를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이념의 대립으로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였다.

 

전쟁 이전부터 극심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는데,

한국 전쟁은 남한에서 죄익세력에 대한 공세가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보도연맹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같은 처참한 인명 피해가 일어났다.

또한 군 고위직들의 부패로 인하여 국민 방위군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것은 제2국민병으로 징집된 국민 방위군 5만명이

 기아와 혹한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외에도 1952년 대통령직선제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연행한 부산정치파동,

중석(텅스텐)으로 번 외화의 환율차익으로 정치자금을 축척한 중석불사건도 있었다.

임시수도 사건의 이런 사건들은 당시 우리나라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1950년 6.28일 한강철교를 폭파하여 150만명의

서울시민과 4만명의 군인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철교를 건너던 800여명의 피난민들을 수장시킨후 북한군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도망을 다니다가

 

1951년 1월 3일, 그 당시 도지사 관사였던 곳에 

사빈당( 나라를 생각하는 집)이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임시 수도의 집무실로 사용했던 곳을 

1984년임시수도 기념관으로 개관을 한 것입니다.

 

임시수도기념관 입구 현판에는 사빈당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독립운동가 한형석 선생이 글씨인 사빈당은 임진왜란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면서 읊은 시 서울을 떠나 큰 계책을

생각하노라(去思邠大計)라는 시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따온 것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한 상황과의 유사성을 느껴

관저의 당호를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빈당의 유래

 

사빈당 현판의 글씨는 1980년대 초반 고(고)한형석 선생이 쓴 것이다.

한형석 선생은 1910년 동래 출신으로서 일제 강점기에 중국에서

독립운동가 항일 군가의 작곡가, 가극 연출가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부산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96년 항년 87세로 부민동 3가 자택에서 작고 하였다.

한형석 선생은 독보적인 필법을 창안한 서예가로 유명하며

서울 부산 등지에서 몇 차례 서예전을 개최하였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의 어록을 뽑아서 충무공 추모 서예전을

전시할 정도로 충무공의 충정을 흠모했다고 한다.

사빈당의 사빈은 고공단보(고공단보)가 다스렸던 빈(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고공단보는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조부이다.

 

당시 빈은 주나라의 도움지로서 지금의 섭서성 순읍현 서남쪽에 위치한 땅이었다 고

공단보는 의로서 다스렸으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그를 받들었다.

그러나 어느 날 서북쪽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땅과 백성을 요구하였다.

 

백성들은 분노하여 싸우자고 하였으나 고공단보는 백성들을 죽여가면서

군주가 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빈을 떠나 기산에 정착했다.

그러나 빈은 모든 백성들이 고공단보를 따라 왔으며

이웃나라의 백성들까지도 그의 덕을 칭송하면서 귀순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사빈당은 고공단보와 빈의 고사에 빗대어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 대한민국은 북한의 침략에 의하여 서울을 내주고

부산에 임시수도를 만들었다.

 

이처럼 임시수도의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공단보의 빈과 마찬가지로 모든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따라서 모일 것이며,

곧 빼앗긴 땅도 수복할 것이라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임시정부 당시 심겨져 관리된 이대

 

이대는 벼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로,

학명은 Pseudosasa japonica이다.

대나무와 비슷하며, 주로 관상용으로 심는다.

한국에서는 중부 이남 해안지대에서 자란다.

높이 2-5m, 지름 0.5-1.5cm이다. 줄기〔稈〕는 마디가 적고 마디 사이가 길다.

 

보통 위쪽 1개의 마디로부터 가지가 1개씩 나온다. 대나무의 껍질은 단단하고,

긴 털이 누운 형태로 빽빽이 나 있으며 까슬까슬하다.

잎은 바소꼴로 길이 25-35cm, 나비 약 3cm이며

끝은 차츰 길어져 뾰족하고 혁질이며 표면은 광택이 있다.

잎집의 윗가장자리에는 견모가 드물게 나지만 떨어지기 쉽다. 

담뱃대, 죽세공용으로 쓰인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당시 사용했던 그릇과 주걱이며, 아래는 세수대야이다.

 

차가운 날씨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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