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합니다!(테리우스원)

희귀 보호 대상 야생화에 숨은 이야기를 탐구하는 사진 작가 (정필원)

야생화모음(ㅎ)

마음을 울리는 겨울 환타지아(환상곡) 향기!!

테리우스원 2010. 1. 22. 12:35

 

 

형식이나 상상력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 악곡이 환타지아라고 한다.

노랑 색으로 피어난 식물의 이름에도 환타지아라는 꽃 이름이 있다.

음악 장르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것 같이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늘어져 흐느적 거리는 꽃향기

가까이 다가서면 진한 쵸콜렛 맛을 풍긴다는 환타지아 그이름을 부르면서 다시 한 번 보게되는 아름다움에 빠져보자.

 

환타지아(fantasia)-幻想曲으로 상징적인 언어로

형식과 연주의 자유라는 특성은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1714~88)와 베토벤, 쇼팽, 모짜르트, 슈베르트 등의 곡에까지 계속 나타났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은 최고의 걸작으로 환영받고 있으며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세상에 공개되어 알리는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고 항상 악보를 가슴에 품고 다닐 정도로 사랑했던 작품이라 전한다.

그런 이유로 적흥 환상곡은 쇼팽이 사후에 출판 되면서 유작(遺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프랑스인으로 폴란드로 이주한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젤라조바볼라의 스카르벡 가문을 포함한

여러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하였고 스카르벡 집안의 가난한 친척과 결혼을 하여 쇼팽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쇼팽은 천부적으로 음악에 재능을 안고 태어난지 1년이 도래 되기전에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바르샤바에 있는 학교 프랑스어 교사가 되었기에  쇼팽이 어린 나이에도 1823~26년 그 학교에 다녔다.

 

특별하게 가족 모두가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린시절 쇼팽도 항상 가족중 누나와 어머니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음악적으로 타고 태어난 재능에 새로운 싹을 틔우곤 하였다.

 

 

 

 

 

6세 무렵에 이미 그는 그가 들었던 것을 재현하려고 하거나 새로운 선율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다고 전한다.

이듬해 61세의 보이체크 (아달베르트) 지브니를 스승으로 모시고  피아노 연주 배우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지브니는 유행하던 근대의 기교파 작곡가들과 바흐, 모차르트 및 베토벤의 가치를 비교·고찰하는 명민한 감각을 소유했던 다재다능한 음악가였다.

어린 나이의 쇼팽은 개인 저택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초청되었고 8세에 공공 자선연주회에 공개연주를 최초로 가지게 되었다.

3년 후 의회 개회를 위해 바르샤바에 온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앞에서 그는 새로운 종류의 오르간인

에올로멜로디콘(지방 음악가가 고안)으로 즉흥 연주를 하는 음악의 신동이란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신동으로서의 명성은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7세에 그는 폴로네즈 G단조를 작곡하여 출판했으며

곧 그가 작곡한 행진곡이 콘스탄틴 대공의 마음을 끌어 대공 자신의 군악대가 행진할 때 이 곡을 쓰도록 했다.

 

그밖에 총명함을 알리는 음악활동으로 16세가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새로 설립된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을 시킨다.

음악원의 교장이 바로 폴란드의 작곡가 요세프 엘스너였는데 쇼팽은 그에게 여러 해 동안 음악에 대한 폭넓은 이론을 깊이 있게 배우게 된다.

 

쇼팽에 있어 교장선생님이 최고의 스승이었는데 낭만주의적 경향의 작곡가로서 전통적인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독창적인 상상력을 단순한 제도적 교육의 테두리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스런 음악의 세계를 거닐게 교육한 공로가 빛을 발하게 된 동기였다. 

 

바르샤바의 활기찬 음악생활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보다 폭넓은 음악적 경험을 필요로 했다.

재정적 보조 요청에 대한 정부의 거절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녀에 대한  헌신적인 부모는  빈으로 보낼 수 있는 돈을 구할 무렵

빈의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에게 쇼팽이 선전을 위해 무료로 공개연주회를 갖는다는 조건으로 그가 작곡한,
모차르트의 〈라 치 다렘〉 주제에 의한 변주곡들을 출판할 것에 동의하면서 빈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다.
 
빈에서 쇼팽은 1829년 8월에 2번의 연주회를 가지는데 마음을 파고 헤집는  섬세한 터치로 청중들에게  충격을 주는 대단한
음악의 선율을 선보이는 재능을 보여주게 된다.
 
 

 

 

 
1829년 9월 바르샤바로 돌아온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의 매력적이고 인기있는 젊은 성악도인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와 사랑에 빠졌다.
 이 시기의 그에게 있어 영감의 원천은 사람의 목소리(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포함된 것)로, 아름다운 선율과 현란한
장식이 있는 야상곡과 시적인 기교를 보여주는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의 서정악장들도 이때에 작곡되었다.
1830년 3월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 연주로 성인으로 바르샤바 데뷔를 했다.
그는 이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콘스탄티아를 추억하여 작곡했다고 고백했다.

1835년은 쇼팽은 보헤미아의 카를스바드에서 그의 부모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가서 오랜 폴란드 친구인 보드진스키 일가를 만났는데 그 집안의아주  매력적인 16세의 딸 소녀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지만

결혼은 쇼팽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소문을 들은 보드진스키 부인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836년 가을 리스트와 그밖의 문학하는 친구들과 함께 쇼팽은 선정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여류 소설가인 조르주 상드(오로르 뒤팽 혹은 뒤드방 부인)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스스로 원해서 그의 정부가 되었다.

그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얼마 안 가서 행복한 생활은 끝나고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가 결핵이라는 소문이 전해지자 그들은 그곳에서 쫓겨났으며 멀리 떨어진 발데모사의 마을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1839년 3월초에 마르세유에 도착했으며 훌륭한 내과의사의 도움으로 쇼팽은 불과 3개월 만에 충분히 회복되어

 파리로 돌아갈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파리 남쪽으로 290km 정도 떨어진 노앙에 있는, 아내 상드가 좋아하는 시골집에서 1839년 여름을 보냈다.

쇼팽 역시 처음에는 장미꽃이 피고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는 한적한 정원에 매혹되었지만

자신이 전원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깨달았고 건강은 차츰 더 악화 되어지게 되었다.

 쇼팽에 대해 모성애적인 태도를 갖게 된 아내 상드는  여름이면  그를 노앙으로 데려가 신선한 공기를 쐬며 건강을 회복하게 도왔다.

 아버지가 죽은 후 쇼팽은 〈환상곡 F단조(1840~41), 〈바르카롤레〉(1845~46), 〈환상 폴로네즈〉(1845~46),

〈발라드 A장조〉(1840~41), 〈발라드 F단조〉(1842), 〈소나타 B단조〉(1844) 등과 같은 소품과 그밖에 보다 규모가 큰 작품 등

자신의 작품 중 상당수를 노앙에서 평강을 되찾고 음악이란 새로운 세계를 꿈구는 시간을 작게 된다.

 

 

 

 

 

 

그 후 상드와의 긴장된 관계로 인해 점차 우울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1847년 여름 더이상 노앙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듬해에 결국 상드와 이별을 고하고 결국 재결합에 실패한다.

 

상드와의 결별이 가져다준 정신적 파탄속에 쇼팽을 숭배하는 스코틀랜드인 제자 제인 스털링의 초청을 수락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방문하고 필하모닉 협회에서 제안한 직책을 포함한 모든 고정 직책에 대한 제의를 거절하고는

런던 순회 레슨과 파티 참석에 열을 올렸다.

  

어느 한여름에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스코틀랜드로 탈출해서 에든버러, 글래스고 및 스털링 근처에 있는

스털링 귀족 가문의 몇몇 친척 집에서 쉬게 되었지만 점점 쇠약해지고 향수병에 시달려 스털링의 헌신적 애호에

사랑을 보답할 수 없다는 난처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면서 작곡을 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되었다.

 

1849년  마지막 남은 몇 달 동안 보고 싶어하던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남은 생을 보냈다.

쇼팽은 폴란드 사제로부터 종부 성사를 받고 자신의 미완성 악보를 파기할 것과 그의 장례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하도록 유언했으며 그의 마지막은 평온했다.

장례식은 10월 30일 마들렌 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1년 후 깨진 리라를 들고 슬퍼하는 뮤즈를 조각한

기념비에 “여기 파리 하늘 아래 그대가 잠들고 있으나, 그대는 영원히 조국 폴란드의 땅 위에서
잠들어 있노라.“라는 비문이 새겨졌고 폴란드에서 가져온 흙이 그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

그는 현재 프랑스 파리의 애국지사나 공이 큰 예술가들이 묻히는 페르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페르라셰즈 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 중 하나로 파리의 북쪽에 있다.

비록 폴란드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아 엘스너를 실망시켰고,

파리 귀족들의 응접실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폴란드의 망명 애국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를 낙담시켰으며,

 규모가 큰 학구적인 업적으로만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성 비평가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가치는 보다 통찰력있는 동시대인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의 다른 비평가들은 절묘한 기교와 일정한 방향이 없는 자유롭게 조화된 놀라운 독창성에 감탄하게 된다.

현재 쇼팽 인간 내면의 깊숙히 숨겨진 곳을 보는 안목과 투시력를 피아노의 선율에서 뿜어낼수 있는  신비롭고

새로운 음향의 발견으로 인해 불멸의 음악인들 가운데 우뚝 서게 되면서 사랑릐 박수를 받고 있는지도 모름다.

 

쇼팽은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적인 선율을 만들었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드문 재능을 가졌다.

결코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는 것으로 비록 그 본질에 있어서는 낭만적으로 하지만 그의 음악에는 낭만주의의 치장을 쉽게 찾을 수 없다.

모든 작품속에는 고전적 순수함과 신중함이 그대로 묻혀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은 세개의 도막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흥 환상곡에서 나오는 세도막 형식의 중간부분은 학창시절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불렀을 만큼 매우 감미롭고 매력적이다.
선율이  끝이 날 무렵에는 스쳐지나가는 가을 바람처럼 아쉬움과 애잔함의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음악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귀를 통하여 깊은 내면의 마음속에 잔잔하고

은은하게 울려오는 메아리의 잔상을 남기는 예술임에 틀림이 없다.

들려주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에 두눈을 지긋이 감고 쵸콜렛 향기를 풍겨주는 환타지아 꽃과 함께 영원한 사랑의 노래로

우리들의 심금을 감동 시키는 아름다움이 되길 소망드리면서 

 

 

사랑합니다 그리고 행복하세요!!

 

 

환타지아(fantasia)

꽃말은 영원한 나만의 향기

 

 
쇼팽의 즉흥 환상곡
믹시
반응형